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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생물에 비유하는 것은 역동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정치란 것이 분할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면 그로부터 나오는 반향이 있을 때에만 실제로 수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정치적 스펙트럼의 어디를 보아도 역동성과 수행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병우 일병 구하기’라는 우스갯소리가 말해 주듯이 각종 비리 의혹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이제 수사까지 착수한 인물을 기어코 청와대에서 내보내지 않으려 하는 권력자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물론 언론과 평론가 들은 이런저런 분석을 내놓긴 한다. 그리고 그 결론은 ‘레임덕을 막기 위해서’라거나 ‘밀리면 안 된다’라는 생각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틀린 분석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빠져 있는 느낌이다.

막 새로운 강령과 지도 체제를 마련한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강령 논의에서 노동자라는 단어를 놓고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다. 이 말이 주는 무게에 비해 가볍다는 느낌이 든 것은 당의 역사와 현실을 감안할 때 별로 의미 있는 논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민주당에게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 정당에게) 강령은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있을 뿐이지 그것으로 인해 당의 방향과 대중적 호소력이 정해진 적은 없는 희한한 물건이다.

‘낡았다’라는 말도 미안할 정도로 퇴행적인 진보정당 혹은 진보운동의 모습도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노동당 안에서는 메아리 없는, 스텔스 같은 욕설만이 난무하고, 밖에서는 민주노총 중심의 새로운(?) 진보정당이라는 철 지난 약을 팔겠다는 좌판이 깔리려는 모양이다. 법외노조가 된 것을 계기로 해서 조직 내 주도권을 얻어 보려는 전교조 내의 움직임도 반향이 없긴 마찬가지다.

누구나 변화와 혁신을 말하지만 흔히 말하듯 ‘감동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감동은 고사하고 움직인다는 느낌조차 받을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했듯이“ 결국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피조물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뭔가를 한다 하더라도 의지를 가지고 구상을 실현하려고 한다. 특히 정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절대적인 목적을 추구하든 아니면 주어진 조건에 대한 반응이든 간에 의지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의지는 그 의지가 만들어낸 구조와 인습에 가로 막혀 있는 꼴이다.

물론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것도 의지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런 의지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다. 주체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관찰에서 시작해서 성찰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물론 그 이전에 필요한 것이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새로운 흐름은 꼭 잿더미 속에서는 아닐지라도 패배 속에서 등장한다. 진심으로 패배를 인정하자!

객관적 조건이라는 면에서 변화의 가능성 혹은 폭발의 잠재성은 도처에 있다. 사실 우리는 꽤 오래 전부터 “화산 지대를 걷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더 긴 말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마그마가 터져 나올 수 있는 틈새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만 해 두자.

그동안 새로운 좌파정치세력의 형성 그리고 이것의 기초가 될 새로운 사회운동의 구성을 목표로 한 프로그램을 제출하는 것이『좌파』의 주된 과제였다. 위기의 시대에 대한 인식 속에서 가다듬은 프로그램 자체가 그 내적 논리라는 측면에서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프로젝트가 실패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포르투나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일까? 비르투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이보다 더 디테일한 수준에서의 문제인가? 만약 거시적인 관점에서 프로그램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처럼 구체적인 심급과 실행의 수준에서 문제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제대로 된다면 거시적인 수준의 프로그램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진정으로 바깥에서 바라보기 혹은 시차視差가 필요한 때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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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41호(2016년 09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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