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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백남기 님이 돌아가셨다. 수많은 불행 속에서도 다행인 것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 때문인지, 70세 생일을 넘기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약간의 위로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작은 것에서나마 위로를 찾는 이유는 그저 슬퍼하지 않고 살아남은 자로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와 의지 때문이다.

백남기 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너무나 강력한 물대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게 제대로 통제되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즉자적이긴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우리의 감정이 솟구치는 이유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뻔뻔스럽고 무책임한, 더 나아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찰과 정부 때문이다. 사태의 원인이 구조적인 것이든 혹은 일탈적인 것이든 간에 이들이 보이는 태도가 사람이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에는 당연히 도덕적 분노가 뒤따른다.

그런데 그가 차가운 거리에서 물대포에 맞서야 했던 이유의 바탕에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농민의 현실과 요구가 있었다. 그가 직접적으로 말했던 것은 쌀값을 정부가 제대로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쌀자급률이 100퍼센트가 넘는데도 쌀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풍년은 농민들에게 달갑지 않은 현실이 되었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정부에 요구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차갑고 무서운 물대포뿐이었고, 이보다 더 잔인한 것은 그 이후 벌어진 사태다.

이른바 농업 문제에 한정해서 보자면, 적정한 총 식량 자급률을 유지하면서도 그 내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논의 일정 부분을 밭으로 전환하는 일이 필요하다. 앞서도 말했듯이 쌀은 이미 100퍼센트 이상의 자급률을 보이는 데 반해 대부분의 다른 작물은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식생활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전환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종합적인 계획과 이행에 따른 조치가 필요하며, 이는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다.

물론 농축산식품부 등이 나서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말의 잔치로 끝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경험이 이런 방향을 지시한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나라가 대다수 보통사람의 나라가 아니라 소수의 자본가, 특권층, 고위 관료의 나라라는 것이다. 물론 한 사회가 이렇게 나뉘어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그 어떤 소통도 없이 두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갈등과 언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때, 만약 제대로 제도화되지 않는다면 결국 폭발적인 충돌을 통해서만 민주주의는 작동하고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배하는 자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꽤 오랜 전에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의 이야기는 신학적이면서도 우화적인 경로를 거쳐 ‘사랑’이라는 대답으로 나아간다. 소박하면서도 이타적인 삶을 살고자했던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살짝 비틀면 좀 더 구체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관계를 말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상호 의존성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문제는 상호 의존하는 사람들의 위치와 힘이 어떠하냐다. 이른바 관계가 일방적일 때 사랑이 또 다른 폭력으로 변한다는 것은 일상의 무수한 예에서도 알 수 있다. 혹은 위치와 힘이 비대칭적일 때 그건 사랑이라는 이름의 종속 관계를 뜻할 수도 있다.

결국 사람들이 상호 의존적이지만 독립적일 때 사랑은 폭력이나 종속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고유한 가치와 지향을 지닐 수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도덕적으로만 독립적인 개인을 말하고 있을 뿐 현실에서는 자본주의적 관계 및 광포한 시장경제에 모든 것을 맡겨놓았고, 이로 인해 대다수는 오직 의존적이기만 한 개인들을 낳았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오직 불안과 허무만을 남겨 놓았다. 오늘날 가진 자들이 보이는 부도덕한 의지와 대비되는 가난한 자들의 데카당스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런 데카당스를 넘어서서 사회를 모든 면에서 활력 있게 만드는 길은 모든 사람이 ‘실질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뿐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물질적 조건이 포함되며, 이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내놓는 것이 우리 시대의 의제다. 그 가운데 기본소득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까지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당장의 생계를 위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를 제대로 된 관계 위에 올려놓기 위한 기반이다.

백남기 님의 죽음이 폭압적인 권력에 대한 인간적인 분노를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이렇게 깊은 문제, 즉 오늘날 국가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비는 것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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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42호(2016년 10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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