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d_201611

150년도 더 전에 칼 맑스는 “독일에서 종교 비판은 끝났다”고 했지만 그 이후 맑스주의는 ‘이데올로기론의 공백’으로 고통 받았다. 이 공백을 때마다 메운 것은 언제나 정치의 혁신이었는데, 이는 정치의 주동성의 발견과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설정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데올로기론의 공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효과를 확인한 것은 그런 대로 성과라 할 수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 ‘87년 체제의 한계’ 운운하면서 개헌론이 나오고 있다. 이들이 한계로 말하는 것은 권력 구조, 주로 5년 단임의 대통령제에 맞춰지고 있다. 5년이라는 임기 제한,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것으로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5년 단임제는 책임 있는 정치를 어렵게 하고 대통령의 제왕적 성격은 권력의 행사가 비뚤어진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비뚤어진 권력 행사가 가능한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저 대답은 인격personality에 맞추어진다. 그러니 이를 알기 위해 문학비평의 다양한 접근법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권력자에 대한 정신분석이 행해지고 생애사가 조명된다. 누구에게는 CEO로서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찾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부모를 잃은 불행했던 젊은 시절과 그 공백을 메워 주었을 누군가의 사랑 (과 영향력)이 거론된다. 그럴듯한 분석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이런 인물을 대의제 하에서 대중이 지지해서 그 자리까지 올린 힘은 무엇인가?

지난 십 년 사이에 대선의 키워드는 경제와 복지였다. 전자는 여전히 신자유주의의 흐름이 강한 상태에서 전반적인 경제성장이 개인의 삶의 증진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고, 후자는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가 어느 정도 깨진 상태에서,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대중의 삶의 현실이 비참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서 힘을 발휘했다. 여기에서 대중이 어떤 희망을 발견하고 자신을 투사한 것을 우리는 ‘전이’라는 말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이를 둘러싼 상황에 대한 설명은 사실 넘쳐 난다. 제한된 정치 지형, 스타 정치인에 대한 투사, 스펙터클한 미디어 환경, 신자유주의에 와서 더욱 노골화된 소비자주의 등등. 물론 그 바탕에는 ‘경제적 공포’가 있고, 이는 정세적으로 ‘대안은 없다’라는 말로 요약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진보파와 좌파의 대응은 점진주의와 매복(일종의 대기주의)이었다. 전자는 중도파와 손을 잡고 하나하나 권력의 관제 고지를 점령하자는 것이고, 후자는 적절한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가운데 정치 지형의 변화를 꾀하자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전자는 87년 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원했고 후자는 87년 체제의 변화를 도모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보자면 어느 쪽도 주관적 목표와 객관적 변화 모두 이루지 못했다.

주체들의 무능력을 탓하는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상황의 변화, 전반적인 지형의 변화를 읽어 내는 게 더 필요한 일이다.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는 약화되기는커녕 더욱 강화된 형태로 변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의지가 이전의 자본주의 관리자들이 보인 의지보다 더 강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이전 자본주의의 동학을 규정하고 또 이에 따라 움직인 계급 지형이 바뀐 탓이다. 이는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실질 경제의 성장보다는 자산 가치의 증대를 통한 이윤 추구라는 패러다임의 변화, 기술혁신과 비용 축소가 더해지면서 나타난 노동의 불안정, 서비스 산업으로의 전환 속에서 나타난 저임금 (여성, 노년, 청년) 노동의 증대 등등 에 따라 과거처럼 집단적이고 조직적이고 강건한 산업 노동자계급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카지노 자본주의’나 ‘지대 자본주의’ 혹은 ‘벌처 자본주의vulture capitalism’라는 말은 계급 간의 포지티브한 관계에 의한 자본주의 운영이 아니라는 것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정치와 경제의 단락shortcut을 잘 보여 준다. 때마다 터지는 ‘-게이트’는 당연히 일시적 일탈이나 병리가 아니며 현재의 체제가 작동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권력과 정보, 이를 움직이는 관료제는 이윤을 추구하고 또 추구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전술적 자산이다.

다시금 환원주의가 아니라 정치의 주동성과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이때 환원주의는 계급 환원주의가 아니라 ‘진실의 정치’라는 환원주의다. 브레히트가 “이성의 승리는 이성적인 사람들의 승리”라고 했을 때 이는 바람을 달리 말한 것이지 논리를 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신발보다 나라를 더 자주 바꾸는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87년 체제의 한계를 말하고 포스트87년 체제를 겨냥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동맹이 필요할 것이다. 이 동맹은 포스트 공산주의 시대의 최저 기준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며, 포스트87년 체제가 가능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좌파가 여기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 이 글은 제43호(2016년 11월호) <책 머리에>이다.

43호_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