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철학 산책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식

/ 임영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연구원

고등학교 때 한문 선생님은 고루한 한문 선생님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분이셨다. 나이는 많이 드셨지만, 늘 체크무늬 재킷을 입고 다니셨는데, 셜록 홈스가 썼음직한 모자가 덧붙여져 세련된 도시 중년의 용모를 완성한 듯 보였다. 입시에 포함되지 않은 과목의 수업들이 그렇듯이 한문 시간에 집중해서 수업을 듣는 친구는 많지 않았다. 나 역시도「적벽부」 같은 글을 배웠던 것 같긴 한데, 지금은 그 내용은 물론이고 어떤 글을 배웠는지도 거의 기억할 수 없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나는 대목이 있다. 아마 마지막 한문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제 어른이 되어 기나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선생님으로서 마지막 조언을 해 주는 시간이었으리라.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들은 반 친구가 더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 들은 이야기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지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셨다. 현지顯知와 묵지默知.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떠올리며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이 현지, 곧 드러나 있는 지식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지닌 지식에는 그런 현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책에서든 경험을 통해서든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운다. 그렇게 배운 것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배운다고 할 때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은 배우고 까먹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드러난 지식(현지) 밑에는 배우긴 했지만 이미 까먹어 버린 무수한 지식(묵지)이 넓게 깔려 있다. 이렇게 거대하게 생겨난 묵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하지만 묵지가 그 사람의 인격에 무언가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열심히 읽고 열심히 까먹어라. 까먹는 일 따위는 걱정하지 말고 읽고 또 읽어라. 그렇게 쌓인 지식이 너희들 인생에서 커다란 자산이 될 거이다. 선생님의 말씀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씀이었다. 당시 나는 입시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어서, ‘한번 입력된 지식이 내 머리에 그대로 저장되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허황된 생각을 하곤 했다. 까먹게 될 것이 두렵다는 핑계로 책 읽기를 피하는 무의식도 아마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지금까지 살면서 책을 멀리하지 않게 된 데에는 한문 선생님의 그 말씀이 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메논의 역설

플라톤은『 메논』에서 지식을 탐구하는 데서 생기는 근본적인 역설을 제기한다.

사람은 아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도 결국 탐구할 수 없다는 것 말일세. 말하자면, 적어도 아는 것은 탐구하지 않을 걸세. 왜냐하면 이미 알고 있으니까, 또 적어도 그런 사람은 탐구가 전혀 필요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알지 못하는 것도 탐구하지 않을 걸세. 무엇을 탐구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니 말이야. (플라톤,『 메논』, 80e)

지식의 탐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함을 지적하는 역설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탐구하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으므로 탐구할 필요가 없다. 알지 못하는 사람도 탐구를 못한다. 무엇을 탐구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플라톤이 이런 역설을 제기한 것은 자신의 진리관을 펴기 위해서다. 우리의 영혼은 불멸이므로 비록 육체가 죽더라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 영혼은 전생에서 배운 지식을 이미 다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할 일은 전생에서 영혼이 배워 알고 있는 지식을 다시 찾아내는 것이다. 흔히‘ 상기론’으로 불리는 이런 생각은 신화적인 틀로 제시되고 있긴 하지만, 그 뒤의 철학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후대의 합리론자들이 선험적 지식이나 본유관념 등으로 계승하게 된 것으로, 우리의 경험과는 무관한 객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메논의 역설은 우리 상식과 너무 동떨어진 얘기라 수긍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딱히 무엇이 문제인지를 콕 찍어 내기도 쉽지 않다. 이런 메논의 역설을 실마리로 지식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펼친 학자가 있다. 바로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1891~1976)다.『 거대한 전환』으로 잘 알려진 칼 폴라니Karl Polanyi(1886~1964)와 형제 사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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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_임영근_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