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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얼마 남지 않은 2016년을 보내면서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선정 소식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의 죽음과 함께 가장 큰 사건으로 기록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정위원회가 “위대한 전통 안에서 미국 음악의 새로운 시적 표현new poetic expression의 창조였다”라는 선정 이유를 밝혔지만, ‘문학의 경계’를 중심으로 한 논란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카스트로의 죽음은 그만큼은 아니겠지만, 위대한 혁명가/독재자의 이미지는 20세기의 혁명과 사회주의를 둘러싼 논의의 일부를 구성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밥 딜런의 수상 소식을 들으며, 그리고 곧 이어진 촛불시위에 함께하며 많은 사람은 그의 세 번째 앨범인《시대가 변하고 있다 ‘The Times, They Are A-Changin’》에 들어 있는 같은 제목의 노래를 떠올린다. 한 일간지에 실린 신형철 교수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하면 “사람들아 여기 모여라/ 그대가 어디를 떠돌고 있든/ 인정하라 그대 주위의 물이 차올랐다는 것을.” 이렇게 시작한 노래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선, 그것이 그어지고/ 저주, 그것이 내려진다/ 지금 느린 자는/ 훗날 빠른 자이리/ 지금 이 현재가/ 훗날 과거가 되듯이/ 질서는 급격히 쇠락해가고/ 지금 맨 앞인 자가 훗날 맨 끝인 자가 되리라/ 시대는 변하고 있으므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지난 10월말 최순실의 태블릿 피시 내용이 공개되면서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은 시간이 흐르면서 광야를 불태우는 불길로 커져 갔다. 대통령제 하에서 모두가 자신의 처지를 바꾸고 혹은 제자리를 찾기 위해 내는 목소리는 언제나 청와대를 향했는데, 이게 한목소리가 되어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사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밥 딜런의 두 번째 앨범인《제멋대로인 밥 딜런 The Freewheelin’ Bob Dylan》에 들어 있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 Blowin’ in the Wind〉을 부르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귀가 있어야/ 그가 사람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나?/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어야 알 수 있나?/ 너무 많이 죽었다는 것을.” 최소한 2009년의 쌍용차에서 2014년의 세월호와 2015/16년의 백남기까지, 귀를 열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얼마나 수많은 목소리가 있었는가? 하지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에 흩날리고 있네, 바람만이 알고 있네”라는 가사를 삼켜야 했다.

이런 변화를 두고 ‘혁명은 도둑처럼 온다’라거나 ‘끝내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변화가 있을 것이다. 최소한 지금보다 조금은 낫다고 여겨질 변화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변화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하이재킹 당한 경험이 여러차례 있다. 가장 가까이로는 지금의 체제를 만들어낸 1987년의 일이다. 6월항쟁의 열기가 밀실의 8인 회담을 거쳐 현행 헌법이 만들어졌고, 그저 우리가 손에 쥔 것은 대통령 직선제뿐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내적 모순으로 파열하고, 토대 자체가 약화되고, 새로운 요구가 등장하면서 변화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문제는 그 계기가 어디서 올 것인가였을 뿐이다. 헌법에 보장된 절차적인 계기는 언제나 선거, 특히 대통령 선거였다. 하지만 선거가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졌건 그 결과는 경제적 성장의 신화에 기초한 보수적인 체제의 지속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민주주의적 개혁이 기어 오기도 했고, 한 번에 낭떠러지로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이런 절차적 계기 전후로 대중적 에너지가 분출했다는 것이다. 2002년, 2004년, 2008년에 일었던 촛불시위가 그것이다. 두 번은 개혁적인 대통령을 뒷받침하는 힘이었고, 마지막 것은 불통의 대통령의 불도저를 막는 힘이 되었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최소한 1997년 이후 전면에 등장한 사회양극화를 해결하고 민주공화국의 실질적인 토대를 만들 수 있는 힘으로 전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우리의 바람은 밥 딜런이 1965년에 낸 앨범인《모두를 고향으로 데려와라Bring It Back All Home》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향수 블루스Subterranean Homesick Blues>의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를 알기 위해/ 일기 예보자가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가사는 행동의 신호로만 읽어야 할 것이지 구체적인 의제로 읽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야, 퇴진, 탄핵을 위한 촛불시위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는 동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공간의 열림일 수 있다. 제도적인 일정 속에서 이 공간이 새로운 정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어지는 계기를 끊임없이 만들지 않는다면 이번 촛불시위도 또 다른 하이재킹으로 끝날지 모를 일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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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44호(2016년 12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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