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말하다

《터널》, 한 편의 재난 영화가 끝날 때*

/ 강승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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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영화《터널》이 개봉됐다. 자동차 영업사원인 하정우(이정수 역)는 갑자기 무너진 터널에 갇힌다. 언론은 한낱 흥밋거리로 사고를 다루고, 정부는 무능하거나 우스꽝스럽다. 갇힌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안에서 사투를 벌여 나간다. 사고의 원인은 공사에 쓸 돈을 접대비로 쓴 것 따위로 인한 부실 공사로 판명되고, 구조는 계속 실패하고 만다. 그러는 사이 주변 터널 공사의 이해관계 충돌을 비롯해 여러 사건이 있게 되고 실종자 구조는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생명의 끈을 놓지 않은 실종자 하정우의 클랙슨 소리와 그걸 듣게 된 구조대장 오달수(김대경 역)의 책임감 있는 행동 끝에 하정우는 구출된다.

이렇게《터널》은 재난, 그리고 그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배신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영화《괴물》 이후 일반적인 소재이지만, 이 영화는 우리 사회의 좀 더 특별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

《터널》, 부정할 수 없는 유사성

이미 많은 이가 지적했다시피, 이 영화는 실제로 일어난 참사들, 특히 하나의 사건의 영향을 받았음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첫 장면은 상징적이다. 답답한 구도에서 작은 구멍으로 물이 흐른다. 여기서 관객은 일어난 지 채 2년밖에 되지 않은, 구조되지 못한 채 물이 차올랐던 비극적인 사건을 연상하게 된다.

언론과 정부에 대한 풍자도 마찬가지다. 노골적으로 표명되는 정부의 겉치레 대처와 언론의 자극적인 취재 속에서 우리는 참사 이후 매번 제기된 언론과 정부에 관한 수많은 비판을 상기하게 된다. 여기서 많은 이는 공감을 표하기도 한다. 2014년의 세월호 참사. 이 사건이야말로 2013년에 발표된 원작 소설《터널》과 2016년 개봉된 영화《터널》 사이에 생긴 차이의 원인일 것이다.

《터널》이 지운 것,《터널》이 기억한 것

바로 그 유사성 때문에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적잖은 사람은 《터널》이 세월호 참사와 같은 참사들을 연상시키지만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며 비판한다. 정부나 언론에 대한 비판이 풍자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사회적인 영화가 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들과 함께 사건에 대한 이 사회의 한계 역시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제대로 파헤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실종자인 하정우를 구출한 것은 누구인가? 실종자인 하정우 자신이라고 답하는 순간, 우리는 어떤 재난을 만나도 그저 정신을 잃지 않고 살아남아야 하는 세계를 마주한다. 구조대장인 오달수의 책임감이라고 답한다면, 우리는 작은 영웅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영웅이 중심이 되는 구조의 영화라고 보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구조대나 구조대장의 사투를 비롯한 능동적 역할은 그렇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화 속에서, 정부와 사회가 계속 하정우 곁에 ‘맴돌도록’ 하는 힘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문제는 바로 그 ‘우리’에 있다. 이 영화에서 ‘우리’, 어쩌면 관객이자 시민의 은유는 ‘재난 관련 방송의 시청자’ 혹은 ‘절반이 넘게 찬성한 구조 포기(터널 공사 찬성) 여론조사의 표’로만 등장한다. 영화는 재난이 일으키는 정치적 상황과 시민들의 행동이라는 문제를 교묘히 빠져나가고 있다.

실종자의 아내인 배두나(세현 역)가 구조 포기, 즉 터널 공사에 동의해 버리게 될 때 일어난 일들이 있다. 첫째로 구조 중에 일어난 사고이고, 둘째로 (아마도) 반전된 여론조사 결과다. 이것은 다시 말해 터널 공사 재개, 즉 구조 포기가‘ 정치적’ 결정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공적인 과정을 대부분 생략했으며, 이 정치적 결정이 매우 사적인 형태로 집행되는 것만을 보여 준다. 실종자인 하정우가 세상 소식을 들을 수 있는 통로는 클래식 라디오 방송뿐이다. 이 방송에 아내인 배두나가 직접 나와서 사회가 하정우를 버렸음을 선언한다. 그리고는 스튜디오를 나서게 되고, 방송국의 직원들은 무관심하게 쳐다보거나 묵묵히 자기 일을 한다. 이 장면이야말로 우리의 생명이라는 문제가 고유하게 공적인 것이 되기를 실패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정한 시민들과 그들의 이기적인 여론을 비난해야 하는가? 그것이야말로 재난 이후 벌어진 사태에 대한 보수주의적 반응이다. 원작 소설이 그러한데, 원작 소설의 경우 실종자 가족은 악플과 같은 대중적 냉소에 시달리게 된다. 실종자와 그 가족은 사회에서도 실제적으로도 말 그대로 보장되고, 모두 자살로 삶을 끝 맺는다. 이것은 시민들 혹은 인민들people이라고 불리는 이들, 정치적으로 역동적인 주체들에 대한 공포를 대변한다.

* 이 글은 초고의 형태로 지난 8월《오마이뉴스》에「정작 중요한 건 비껴간《터널》, 교묘하다」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바 있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 pg.aspx?CNTN_CD=A0002236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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