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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재판과 특검의 수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하야 혹은 탄핵을 직접적인 목표로 한 촛불시위의 첫 번째 국면은 지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침 연말연시라는 자연적, 인간적 시간의 매듭 속에서 이 국면의 동학과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이후 국면을 바라보기 위해서 필요한 일로 보인다.

특정한 입장에서 바라볼 때 촛불시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좌파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꼭 전통적이고 실정적인 의미에서의 좌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퇴진행동’의 주요 참가 단체로 민주노총이 있고, 또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일 때 당연히 거기에 참가할 뿐만 아니라 행진 시에 ‘선두에 서’ 있는 사람들이 좌파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투쟁의 형식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투쟁의 방향과 목표 혹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별다른 목소리도 없고, 특별히 발언권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가장 손쉬우면서도 필요한 대답은 좌파의 약화다. 좌파의 약화를 가져온 한국의 정치 지형과 제도는 말할 것도 없고, 내적인 이유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되었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열린 정치적 공간에서 이 문제는 전망과 관련되기 때문에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선 내적인 이유와 관련해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기존 좌파의 시대착오성이다. 사회주의의 추상적 원칙을 말하는 것 이외에 현실적인 그 어떤 방책도 내놓고 있지 못하는 일부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특정한 정세와 구조 속에서 성립하고 또 전성기를 누렸던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의 좌파가 여기에 해당한다. 누누이 말했듯이 주로 광산업과 제조업 부문의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에 기초한 이런 경향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방어적인 투쟁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나아갈 수 없었고) 결국 보편적 해방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사회적 헤게모니를 추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한국의 정치 지형 및 제도와 관련해서는 분단으로 인한 비대칭적인 토대 위에 자리 잡은 승자독식 제도가 문제라는 것은 꽤 오래전부터 지적된 것이다. 결선투표제와 전면적인 비례대표제의 도입을 통해 이를 바꾸려는 주장도 오래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를 이룰 계기를 잡지 못했고, 힘이 없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촛불시위에서 좌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이번 광장의 정치가 보이는 집중성 혹은 억압성과 관련이 있다. 모든 초점이 대통령의 하야 혹은 탄핵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대중의 물결이 형성될 수 있는 이유가 공통의 인식과 요구라고 하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이번 시위의 초점이 된 하야 혹은 탄핵이라는 요구는 지극히 민주주의적인 목표일 뿐이다. 물론 현재의 비민주적인 정권이 저지른 반민중적 행태가 대중적 흐름의 밑바닥에 있다고 하더라도 사태는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번 시위는 매우 구체적인 인격의 구체적인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드러난 현상은 비상식적이지만 여기에 구조적 원인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말이 될 것이다. 우선 말할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편의적으로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제왕적 대통령제’ 의 문제다.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강력하고 광범위하며, 의회의 견제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틀이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의회의 권한만을 강화한다고 다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임을 기본원리로 하는 대의제 일반이 시간적 역동성의 시련을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에 이를 보완할 장치와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 문제는 앞서도 언급한 대의제 자체를 충실하게 구성하는 것과 연결된다.

여기까지가 헌법으로 표현되는 권력 구조의 문제라고 한다면 그 밑에는 사회적인 구조적 문제도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이것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고, 그 나름의 해법이 나와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나는 정치의 지역적 분할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계급의 과잉 대표성, 그러니까 다른 특정 계급의 과소 대표성의 문제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지난 총선 전후의 유권자 의식 조사를 볼 때 대중의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계급의 담론과 전략에 주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큰 문제는 후자다. 흔히 서울의 강남으로 대표되는 부유층은 계급적 이해관계를 상당히 명료하게 파악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데 반해 이른바 서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거나 아예 탈정치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간단하게 탈정치화라고 말하는 것은 해결 자체를 봉쇄하는 기술일 수 있다. 서민 혹은 민중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사회층의 목소리가 전달될 수 있는 정치적 채널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기존 좌파의 부동성 혹은 새로운 정치세력의 부재와 연관되어 있다. 물론 이를 타개하기 위한 전략적 방침이나 담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계기와 힘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래로부터 물이 끓고 있었다. 마치 브레히트가「취사장에서」에서 “어디를 가나 그들과 눈이 마주치면/ 상대편은 눈을 돌리고 그들을 맞이한 것은 침묵이었다/ 대중은 그들과 별개의 깃발 아래서 행진하고 있었다. ……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활동했다.” 라고 노래한 것처럼. 이렇게 본다면 태블릿 피시와 그 소유주는 정말로 계기였다.

지금 좌파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요구를 구조적 문제로 전환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둘러싼 투쟁을 벌이는 것으로 나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적 의미의 민주주의는 생득권이외에 그 어떤 자격도 요구하지 않는 정치체제이자 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기본적인 원리로 자리 잡자마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투쟁으로 전환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이번 사태의 발단이 어디에 있건 대중의‘틈입’은 사태를 확장하며, 따라서 사태는 조정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도 않을 것이고 원하는 지점에서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팽창한다는 것은 제약 없이 다양한 요구가 분출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그 정의상 다수파의 지배이며, 다수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여기서 좌파의 곤혹스러움이 다시금 제기된다. 좌파는 무엇으로 다수파를 형성할 것인가? 혹은 다수파를 형성할 능력이 있는가?

현재로서는 여기에 제대로 답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 이유 때문에, 어쨌든 한국의 좌파는 다수파를 형성할 가능성은 커녕 거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좌파의 본령을 전투성으로 이해하는 일부는, 이마저도 대개는 말의 잔치로 끝나지만, 전선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서곤 한다. 또 좌파의 원칙을 헌신성으로 치환하는 일부는 개별 사안에 대해 충실하지만 이를 더 커다란 흐름으로 묶는 데 무심하거나 실패한다.

이제 지루한 법정 공방이 이어질 막간의 시간이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곧 두 번째 국면이 열릴 것이다. 이 두 번째 국면에서도 좌파가 이른바 주도성을 발휘하긴 어려울 것이다. 실제를 인정할 때다. 앞서 인용한 브레히트의 시는 볼셰비키에 관한 것이었지만 우리의 맥락에서 그것은 민중 자신의 끈질긴 투쟁을 말할 뿐이다. 우리의 좌파는 여기에 한참 못 미친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좌파가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는 지형과 제도를 만드는 것, 그런 상황에서 여러 집단의 투쟁이 보편적인 지향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좌파의 시간은 오래 전에 지나갔지만 새로운 시간은 아직오지 않은 셈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 이 글은 제45호(2017년 1~2월호) <책 머리에>이다.

45호_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