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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 탄생 직후에 만들어진 이 잡지가 “좌파”라는 이름으로 책을 내는 것은 이번으로 마지막이다. 문재인 시대의 개막과 함께 제호를 바꾸는 건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시대의 흐름이라는 면에서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다.

길게 보면 세계사적으로 좌파가 신뢰를 잃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라 할 수 있다. 동쪽의 좌파는 꽤 오래 전에 자기 약속을 저버렸고, 서쪽의 좌파는 자기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1968년은 이런 좌파에 대한 매서운 채찍이었다. 그런 좌파가 유럽에서 부활한 것은 이미 좌파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정책을 들고 나온 다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좌파 왼쪽의 좌파가 형성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당장 의미 있는 세력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새로운 바람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먼저 불어왔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 21세기 사회주의를 표방한 좌파들이 “분홍 물결” 속에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권력을 잡았다. 이런 흐름이 대서양을 건너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 계기는 2008년 경제 위기와 이에 대한 유럽 각국 정부의 대응, 즉 ‘긴축’에서 왔다. 언론에서 흔히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보통사람들의 저항이 있었고, 이는 새로운 정당이나 기존 정당이 재구성된 혁신 정당을 통해 정치 지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물론 대중의 힘은 왼쪽으로만 흐른 것은 아니다. 난민과 이민, 반이슬람 등의 토픽은 대중의 힘이 오른쪽으로 흐르게 한 수문 역할을 했다. 브렉시트, 트럼프, 르펜, 기타 새로운 우익 정치세력은 이렇게 형성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전후의 케인스주의적 합의가 깨지고 신자유주의의 전성기와 위기를 거치면서 기존 정치질서가 사실상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 잡지가 말하고자 했던 좌파의 요청은 이런 맥락 속에 있다. 하지만 내적인 취약함과 한국 주류 정치질서의 특유성은 좌파에게 의미 있는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좌파는 이중의 의미에서 불편한 담론이었다. 53년 체제 하에서 좌파는 언제나 북쪽에 있는 정치집단과 연루되거나 그게 아니라 할지라도 상상적으로 추방당한 세력에 불과했다. 다른 한편 현실정치에서 좌파라는 말의 쓰임새는 주류가 반대파를 공격하는 일종의 만능 칼이었다. 만능 칼이기 때문에 예리하게 목표 지점을 찌르는 게 아니라 풋내기가 마구 휘두르는 모습이긴 하지만, 대중에게 영향을 줄 정도의 먼지바람을 일으키긴 한다. 그러다 보니 정치세력 사이의 의미 있는 차이는 무화된다.

좌파라는 제호를 버리는 것이 문재인 시대의 개막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 정권의 탄생을 가져온 사태와도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를 ‘포스트민주주의’라는 틀로 보건 ‘매우 한국적인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보건 기성 정치질서와 제도가 대중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거기에 더해 새로운 우파의 등장과 함께 민주주의의 기본권 자체가 위협받기까지 하고 있다. 이럴 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그 자체로서도 중요하고, 계급투쟁과 신분투쟁이 제대로 벌어질 수 있는 장을 확보한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하다.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투쟁은 기성의 담론 질서의 재구성, 새로운 의미 부여 등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좌우라는 개념도 변형의 시험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 이전까지 좌파는 전통과 태도 이상의 것을 의미하지 못한다. 그것마저 한국에서는 아주 부정적이고 왜곡된 것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새로운 길을 갈 때 필요한 것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다. 이때 돌아보는 것은 상황에다 자신을 넣는 일에서 시작한다. 상황은 어떠하고, 과제는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음 호부터 우리는 이런 정신에 따라 “시대”라는 이름으로 독자를 만날 것이다. 시대의 요청에 순응한다는 면에서 겸허하려고 하고, 시대를 만들어간다는 면에서 과제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편집위원회를 대신하여
안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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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48호(2017년 5월호) <책 머리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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