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 제

평화는 왔지만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네
― 베트남에서 대한민국은 학살자였다

 / 최기원 알바노조 대변인, 2011년 병역 거부

“평화는 왔지만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네”

베트남 빈호아 마을 학살 생존자 도안응이아 씨가 우리를 만나 불렀던 노래의 한 구절이다. 그는 오늘따라 자기 대신 죽은 어머니가 그립다고 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마을 사람 모두가 ‘돌아오지 않은 사람’을 따라 어디로 떠난 듯했다. 베트남 빈호아 마을 학살 50주기, 베트남 평화기행에 노동당원 넷이 참여했다. 2011년 병역을 거부하고 수감 생활을 한 필자, 탈핵운동의 중심 노동당 이경자 부대표, 라오스에서 의료자원활동사업을 하던 목화균, 베트남전쟁을 다룬 책을 준비하기 위해 참여한 오준호 작가가 베트남에서 만났다.

빈호아 학살 생존자 도안응이아 씨와의 만남

빈호아 학살 생존자 도안응이아 씨와의 만남

12월 2일, 빈호아

1966년은 베트남 중부 지대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해였다. 파병된 한국군은 80군데 마을에서 9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그 시기는 1966년에 집중되었다. 1966년 12월 3일, 한국군 청룡부대는 베트남 꽝응아이 성 빈호아 마을에서 430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268명은 여성, 128명은 10살 이하의 어린이, 7명은 임부였다. 어떤 이들은 산 채로 불에 던져지고 임신한 몸으로 배가 갈리고 목이 잘려 들판에 걸렸다.

빈호아의 증오비. 왼쪽에는 학살로 얼마나 죽었는지 정리한 표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학살의 구체적 양상을 기록되어 있다.

빈호아의 증오비. 왼쪽에는 학살로 얼마나 죽었는지 정리한 표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학살의 구체적 양상을 기록되어 있다.

살아남은 빈호아 사람들은 몸서리처지는 학살을 증오비로 기록했다. 첫 문장은 다짐이었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에 기억하리라.” 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바래서 글씨가 희미해 보였던 증오비는 50주기를 맞아 노란 바탕에 붉은 글씨로 선명하게 도색되어 있었다. 증오를 기억하겠다는 의지는 빈호아 마을의 자장가 가사에서도 명확하다. “아가야, 이 말을 기억하렴. 한국군이 우리를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커서도 꼭 이 말을 기억하렴.” 빈호아에는 위령비도 있다. 증오비와 위령비는 다르다. 증오비는 학살의 참상을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기 위한 목적이다. 위령비는 학살 현장에 세워져 죽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맨주먹으로 살아남은 이들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죽은 이들의 혼을 달래고 학살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54명이 죽은 구덩이 위에 세워진 위령비가 먼저 세워진 것이었다. 그리고 80년대에 한국군 학살을 밝혀 책으로 펴낸 영국인 작가가 그 인세로 세운 위령비가 있다. 학살 국가가 침묵하고 있을 때 세계가 먼저 학살 사실을 알고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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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_최기원_평화는 왔지만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네